조광조 보고서 W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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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12월 10일
- 2분 분량
조광조 보고서
조광조
조광조의 생애와 업적에 관해 조사한 내용입니다. 조광조d
조광조
1482(성종 13) 개국공신 온의 5대손으로 출생
1510(중종 5)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진사가 됨
1515(중종 10) 조지서사시에 초임됨
1517(중종 12) 교리로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을 겸임
1518(중종 13) 부제학이 됨
11월 대사헌으로 승진
1519(중종 14) 능주에 유배됨
12월 사사됨(기묘사화)
조광조 趙光祖
1482(성종 13) ~ 1519(중종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한성출생.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으로,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오사화로 화를 입고 회천에 유배 중이던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학문은 <소학>,<근사록 近思錄> 등을 토대로 하여 이를 경전연구에 응용하였으며, 이때부터 성리학연구에 힘써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영수가 되었다. 이때는 사화 직후라 사람들은 그가 공부에 독실함을 보고 ꡐ광인(狂人)ꡑ이라거나 혹은 ꡐ화태(禍胎)ꡑ라 하였다. 친구들과도 자주 교류가 끊겼으나 그는 전혀 개의하지 않고 학업에만 전념하였다 한다. 한편, 평소에도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언행도 성현의 가르침을 따라 절제가 있었다.1510년(중종 5)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당시의 시대적인 추세는 정치적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전반적인 흐름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安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1515년(중종 10)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라는 관직에 초임되었다. 그해 가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 감찰, 예조좌랑을 역임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는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이와 함께 정언이 되어 언관으로서 그의 의도를 펴기 시작하였다. 이해 장경왕후(章敬王后, 중종의 제1계비)가 죽자 조정에서는 계비 책봉문제가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이 때 순창군수 김정(金淨), 담양부사 박상(朴祥) 등은 중종의 정비(正妃, 폐위된 愼氏)를 복위시킬 것과 신씨의 폐위를 주장하였던 박원종(朴元宗)을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는데, 이 때문에 대사간 이행(李荇)의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조광조는 대사간으로서 상소자를 벌함은 언로를 막는 결과가 되므로 국가의 존망에 관계되는 일이라 주장하여 오히려 이행 등을 파직하게 하여 그에 대한 왕의 신임을 입증 받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원로파, 즉 반정공신과 신진사류의 대립으로 발전, 이후 기묘사화의 발생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 뒤 수찬을 역임한 뒤 곧이어 정랑이 되고, 1517년에는 교리로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을 겸임하였으며,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하여 <여씨향약 呂氏鄕約>을 8도에 실시하도록 하였다.
[문서정보]
문서분량 : 39 Page
파일종류 : HWP 파일
자료제목 : 조광조
파일이름 : 조광조_2087356.hwp
키워드 : 조광조
자료No(pk) : 16152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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